1. 네덜란드는 2013년 11월부터 2015년 9월까지 장장 2년 동안 건국 200년 기념 프로젝트(200 Jaar Koninkrijk, https://www.200jaarkoninkrijk.nl/)를 시행해 왔습니다. 이 기념 프로젝트에서의 축전 중 하나는 'unity in diversity (다양성의 화합)' 입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큰 프로젝트에서 내걸기에는 어느덧 일반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문구이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여느 나라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세대 간의 차이가 극명해지고 있으며, 여러 이주 민족들 간 및 그들의 세대 간 화합이 필요한 중요한 시기를 걷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자유와 관용을 표방하는 네덜란드의 문화에서 사람들 간의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너무나도 다양하여 갈수록 그들은 여전히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이 다양성의 화합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그들의 노력에 긍정적인 성취를 보였음을 자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2년 간의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는 아주 긍정적인것만은 아닙니다만(http://nos.nl/artikel/2059558-200-jaar-koninkrijk-ging-aan-veel-nederlanders-voorbij.html), 이런 상징적인 프로젝트 자체가 필요불가결한 시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2. 다양성의 화합이라는 키워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네덜란드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의 네덜란드는 중세의 네덜란드와는 사뭇 다릅니다. 중세 네덜란드 지방은 남부와 북부로 나뉘었는데, 북부 네덜란드가 지금의 네덜란드, 남부 네덜란드는 지금의 벨기에 지역 정도 되는데, 지금의 룩셈부르크, 프랑스, 독일의 일부를 포함한 17개(북부 7개, 남부 10개) 주였으며, 각 지역은 공작이나 백작들이 다스렸습니다. 16세기 중엽, 에스파냐가 점차 쇠락의 길에 들어갈 무렵, 에스파냐 국왕 카를 5세와 후계자 펠리페 2세는 로마 카톨릭이 아닌 모든 종교를 억압하였고, 이 때문에 스페인 지방에 있던 무수한 유대교, 개신교도들은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척박한 땅을 함께 일궈나가며 화합하였고, 고유한 문화를 이뤄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에스파냐는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네덜란드 지방에 폭정을 가하였는데,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개신교도들을 억압하고, 무참히 참수하기도 하였으며, 갈 수록 압제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때 오랴네공 빌럼 백작이 1568년 에스파냐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인 것이 1648년까지 80년 간 이어졌는데, 이를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부릅니다. 이 과정은 상당히 복잡합니다만, 주로 북부 네덜란드의 칼뱅주의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1581년 독립을 선언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못하여 1585년 남부 네덜란드는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북부 네덜란드 7개 주만 남게 되었습니다. 북부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와의 화합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게 됩니다.
  3.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남부 네덜란드는 19세기까지 에스파냐/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 있어 왔고, 빈 회의 결과에 따라 네덜란드에 편입되는 것 같았다가 얼마 후 독립하여 지금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되었습니다. 북부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영국(엘리자베스 1세)이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1588년 에스파냐(펠리페 2세)는 영국을 무찔러 해상권을 장악하고 네덜란드를 수복하려는 계획 하에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칼레 해전에서 무적함대는 영국에 대패하게 되고 이 때부터 해상권은 영국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1600년대 초반까지 지역 내에 있는 에스파냐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어 지금과 유사한 국경을 확보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지속적으로 에스파냐와 종교적인 충돌이 있어 왔고, 이러한 종교 갈등은 이미 전 유럽에 확산되어 있었는데 개신교 국가들(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보헤미아 등)과 로마 카톨릭(신성로마제국)간의 충돌을 30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유럽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1648년 유럽의 종교 전쟁을 종식하고자 맺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였습니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계속된 갈등과 화합의 역사의 중심을 걷고 있었습니다.
  4.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17세기 초반부터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항해시대에 합류하게 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와 싱가폴 등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에 점차 밀리고, 프랑스(17세기 루이 14세)의 침략 등으로 황금시대는 저물어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는 18세기 말부터 프랑스에 점령당했었다가, 1813년 프랑스를 몰아내고 왕정을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네덜란드(네덜란드 왕국)의 역사는 이로부터 200년을 계수합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열리며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고 유럽을 재정비하였던 오스트리아 빈 회의(1814~1815)에서 기존의 네덜란드 공화국뿐 아니라 남부 네덜란드도 포함된 영토를 할당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지금의 북부 지방보다 남부 지방이 더 부유하였고, 언어, 문화, 종교, 정책 등 모든 면에서 이미 남과 북 네덜란드는 서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두 지역은 갈등하였고, 결국 남부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831년 벨기에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17세기 황금기에 얻은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도 독립을 하게 됨으로서 네덜란드의 영토는 점차 작아지고 그 명성도 전성시대 보다는 상당히 낮아지게 됩니다.
  5. 네덜란드의 역사는 아주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식민통치 하에 있기도 했고, 독립하기도 하였으며, 황금 시대를 누렸고, 여러 번의 전쟁을 겪었고, 침략하기도 했고 침략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땅덩이가 작고 천연 자원도 많지 않지만 역사, 전통, 문화, 이념, 사상, 종교, 그리고 황금 시대로부터 흘러온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기틀로 확고한 국가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근현대 세계적 변화의 물결과 열강의 권력다툼 속에서도 조용히 내실을 다져왔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dynamic한 범국가적 노력의 연장선 상에서 볼 때, 2년 간에 걸친 네덜란드 건국 200년 기념 프로젝트는 큰 흐름을 바꾸려는 시끄러운 일회성 캠페인이 아닌 화합을 통해 내실을 정비하고 새로운 시대를 미리 준비하는데 있어서의 조용한 견인선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다양성의 극대화, 사회적 혼란의 가중, 대기오염/물부족/전쟁/기근/빈부격차/가난/이념충돌 등 전인류적 현안의 확대, 경제 문제, 불확실성의 확대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있고, 모든 나라들이 다방면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여 역사적으로도 경험이 많고 선진국의 고상한 면모들을 갖추고 있으며 한 발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네덜란드가 어떤 발걸음을 하게 될 지 지켜볼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